병원소개
170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춘원당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춘원당 이야기

춘원당(春園堂)은 ‘봄의 뜰처럼 만물이 소생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기록은 없지만, 5대 윤종흠은 ‘춘원당집 손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조선 헌종 13년(1847년), 무관 윤상신(尹尙信, 1792~1879)은 56세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에서 유의(儒醫)의 길을 걷게 됩니다. 평소 의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여러 의서를 탐독하였고, 근무 중 부상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대 윤빙열(尹聘烈, 1812~1849), 3대 윤기찬(尹基燦, 1848~1912), 4대 윤단덕(尹坦德, 1862~1915)으로 한의(韓醫)는 가업이 되었고, 이후 5대 윤종흠(尹宗欽, 1906~1990), 6대 윤용희(尹容熙, 1931~1968), 7대 윤영석(尹永錫, 1958~ ), 8대 윤홍걸(尹泓杰, 1983~ )과 윤준걸(尹俊杰, 1986~ )로 180년 가까이 한의업의 대는 이어졌습니다.

1847년~1940년대의 춘원당

1대부터 4대까지는 평안북도 박천의 ’박골마을‘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한의업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3대 윤기찬은 자오유주침법(子午流注鍼法)을 정리하여 『침구요람(鍼灸要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3대 윤기찬이 별세하고, 3년 후에는 4대 윤단덕 마저 별세하여 가업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할머니이신 양씨께서는 가업의 맥을 잇고자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한학을 익히게 하였으며,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한의서를 지니고 평양의 명의 김춘성을 찾아가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의생 면허를 취득한 윤종흠은 평양 창전리 모란봉극장 앞에 ‘춘원당(春園堂)’을 다시 개원하게 되었는데, 당시 평양에서 규모를 갖춘 몇 안 되는 한의원이었다고 합니다.

1950년대 이후의 춘원당

부산시 부평동 4가 38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1951년 1·4 후퇴 당시 윤종흠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용희와 함께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한의서와 경혈도, 웅담 등을 지니고 급히 부산으로 피난하였습니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그는 ‘평양 춘원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진료를 이어가며 의업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주요 진료 과목은 부인병과 황달, 늑막염, 소아마비 등이었습니다.

1952년 1월 15일자 『관보』에는 대통령령 제588호로 「의사·치과의사·한의사 국가시험」이 공표되었고, 이어 같은 해 1월 30일자 『관보』에는 보건부령 제12호로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 규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검정시험은 월남한 북한 출신 의료인이나 진료 현장에서의 실무 경험은 있으나 의학 관련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이들에게 한의사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습니다.

이에 윤종흠은 모든 시험에 합격하여 1952년 8월 25일 한의사 면허번호 141번을 부여받았으며, 1974년 12월 2일 시행된 면허 갱신 시에는 20번으로 갱신되었습니다. 아들 윤용희의 면허번호는 1,013번이며, 손자인 윤영석의 면허번호는 3,445번입니다.

제1회 한의사국가시험 합격증, 1952년 7월

한의사면허증, 1952년 8월 25일

부산에서 제1회 한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52년 8월 25일, 윤종흠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으로 이전하여 다시 개업하였습니다. 이후 1954년 5월 30일에는 현재 춘원당이 자리한 돈의동으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서울 시내에 개원한 한의원은 100곳이 채 되지 않았으며, 당시 춘원당은 특히 ‘소아마비’와 ‘부인병’을 전문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소아마비 환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고, 한의원으로 통하는 골목길에는 항상 번호표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긴 줄이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소격동 춘원당한의원, 1952년~1954년

돈의동 춘원당한의원, 1954년~1971년

현재 춘원당한의원은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나, “병을 잘 고치고 용하다는 소문만 나면 어디에 있든 환자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묵묵히 최선을 다해 진료에 전념하다 보면 누구든 자신의 의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이름까지 얻을 수 있다”는 윤종흠의 확고한 신념 때문입니다. 또한 “환자는 자신의 병을 반드시 고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하며, 진료를 받기 위해서라면 의사를 어렵사리 찾아서라도 만나려는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있어야 병이 낫는다”는 믿음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윤영석 원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오로지 환자밖에 모르시는 분이셨습니다. 낮에는 환자를 돌보시고, 저녁에는 책을 읽으시며, 연구에 몰두하셨지요.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라서 ‘대부분의 병은 한의학으로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을 평생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본인은 물론 병원 문턱조차 넘지 않으셨고, 저희가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것조차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더불어 ‘의술을 펼치는 사람은 자신의 명예나 사욕보다도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며, 그것이 곧 의료인의 올바른 자세이다’”라고 늘 강조하시곤 하셨습니다.”

낙원동 춘원당한의원, 1971년~1989년

낙원동 춘원당한의원 증축, 1989년~1997년

선대의 가르침

1980년대 윤종흠 선생과 윤영석 원장 협진 시절

춘원당에서는 처음 환자를 진료할 때 치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 환자를 진료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반면,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치료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강한 약성이나 독성이 있는 약재는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병을 고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환자에게 새로운 병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선대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나름대로 환자를 바라보는 ‘관(觀)’이 분명히 서 있어야 처방 과정에서 혼란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의사의 신념이 흔들리면 환자는 이를 즉시 감지하고, 이는 곧 치료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사는 항상 자신감과 처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임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영석 원장은 “할아버지께서는 실력도 뛰어나셨지만 주관이 뚜렷하시고,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셨습니다”라고 회고하며, 자신도 조부로부터 그런 임상관을 배우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합니다. 한편, 춘원당 처방의 특징은 의서에 기록된 처방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춘원당만의 독자적인 처방으로 환자 맞게 적합한 처방을 ‘입방(立方)’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윤영석 원장은 “할아버지의 스승이셨던 김춘성 선생님께서는 기존 의서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처방(입방)하여 환자를 치료하신 것으로 유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김춘성 선생님께 사사 받은 할아버지께서도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방이나 기존 의서에 있는 처방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직접 입방한 춘원당식 처방을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사용하는 처방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어떤 환자에게 어떤 처방을 쓰면 잘 낫더라”는 기존 방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처방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약재를 병증에 올바로 대입시키는 방식을 잘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본초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지식이 필요하며, 그 바탕 위에서 입방하는 훈련을 꾸준히 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1980년대 윤종흠 선생과 윤영석 원장 협진 시절

윤영석 원장만큼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한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제도권 학교 교육과 더불어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1학년 시절부터는 조부의 진료 현장을 직접 지켜보며 도제식으로 배우면서, 이론과 실제를 함께 익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졸업 후 6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진료했는데, 항상 할아버지 옆에서 맥을 보고 증세를 살폈습니다. 처음 2년은 할아버지께서 구술하시는 처방전을 받아 적기만 했고, 그다음 2년은 반만 받아 적고 나머지 반은 제가 직접 마무리하면서 점차 환자에 대한 제 소견을 덧붙였습니다.
마지막 2년은 제가 직접 처방을 내면 할아버지께서 이를 검토해주시는 방식으로 임상을 배웠습니다”라고 회고합니다. 이어 “요즘 한의대를 졸업하고 처음 임상에 나서는 한의사들이 마음이 너무 조급해져서 유명한 처방이나 새로운 치료법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한쪽에만 치우치다 보면 결국 뒤처질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기본을 탄탄히 다지고, 작은 경험이라도 소중히 쌓으며 욕심내지 않고 환자를 성실히 진료하다 보면 자신만의 확고한 임상관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조언합니다.

윤종흠 선생과 윤영석 원장의 약속

돈의동 춘원당한의원에서 윤종흠 선생과 윤영석 원장

윤영석 원장이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윤종흠 선생께서 손자에게 “너는 정말로 훗날 한의사가 될 것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어린 윤영석 원장은 할아버지께서 진료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고, 한약재를 다듬는 일도 자신 있었으며, 약재의 이름도 다 알고 있어 특별히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에 윤종흠 선생께서는 “그렇다면 우리 사이 약속의 증표로 네 몸에 침을 놓아줄 테니 참고 견뎌야 한다”라고 하시며 벼루와 붓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벼루에 곱게 갈아놓은 먹물로 경락을 따라 손자의 팔과 다리에 침을 놓으셨고, 그 침 자국 위에 먹물로 문신을 새겨 주셨습니다.
이 침 문신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침 시술을 마친 후, 윤종흠 선생님은 손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다짐하게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 첫째, 한의사가 되어 가업을 이을 것.
  • 둘째, 평생 한의업 외에 다른 직업은 가지지 않을 것.
  • 셋째, 자식들도 한의사로 길러 가업의 대를 끊지 않도록 할 것.


위와 같은 세 가지 약속의 증표로 침 문신을 새겼으며, 윤 원장은 조부의 엄숙한 약속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동시에 앞으로 가업을 이어가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춘원당의 특화 치료

현재 춘원당한의원에는 일곱 명의 한의사가 갑상선 질환, 불임, 알레르기 질환을 비롯한 각종 난치성 질환을 분야별로 나누어 진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치료가 까다롭고 어려운 질환들만 고집하여 진료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윤영석 원장은 “양방에서는 완치가 어렵고 재발이 잦은 질환들이지만, 한방에서는 더 근본적이고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치료 과정이 까다로울 뿐이지, 결코 불치병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확고한 견해입니다. 진단에 있어서는 ‘갑상선 기능항진증’이나 ‘갑상선 기능저하증’과 같은 병명에 얽매이지 않고, 체질 변증에 따라 대략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진단과 치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맥진보다는 혀의 상태를 더욱 중시하는데, 이는 맥은 자칫 주관적일 수 있는 반면, 혀〔舌〕는 보다 객관적이고 신속하며 병증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갑상선 질환의 치료에 있어서는 간장, 심장, 비장의 이상 병증을 다스리는 것에 치료의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처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군신좌사(君臣佐使)’의 원칙을 따르는 것은 여타 한의원과 다르지 않으나, 동일한 질환이라 하더라도 봄철에 쓰는 ‘춘방(春方)’과 가을철에 쓰는 ‘추방(秋方)’을 달리하며,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병에 잘 듣는 비방(秘方)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윤영석 원장은 “비방이란 그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 체질에 맞게 조제한 맞춤 처방을 뜻하며,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만능 비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는 비방이란, 우는 아이에게 잠시 사탕을 쥐여 주어 달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그는 “어떤 처방이 좋다고 무조건 맹신하기보다는, 자기의 처방에 대한 주관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처방은 요리와도 같아서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동일한 약재를 사용해도 배합 비율과 조합 방식에 따라 약효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고 치료 잘하는 병원 지향

춘원당한의원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앞서가는 경영 마인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소아마비와 부인병을 특화하여 전문진료 과목으로 진료하였고, 1960년대 후반에는 ‘춘원당한의원’을 상호로 등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춘원당’ 상호를 등록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고객 만족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3개월 단위로 서비스 교육과 분기별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8년에는 한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사라져가는 한의학 자료를 수집·보존하기 위해 한의약 박물관을 설립했습니다. 춘원당이 우수한 치료를 제공하는 한의원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합니다.